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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tup Grind 2026 참관기 — 확신 없는 초입기
AI agent 도입의 초입기, 모두가 확신 없이 빠르게 움직이던 이틀의 기록.
0. 들어가며 — 다들 확신이 없어 보였다
4월 28일부터 29일까지, Redwood City의 Fox Theatre에서 열린 Startup Grind Conference 2026에 다녀왔다. 세션 제목은 전부 지금의 키워드를 향해 있었다. AI native, agent, inference economy, category-defining AI company 같은 말들이 이틀 내내 반복됐다.
그런데 이틀 동안 가장 강하게 남은 인상은 이상하게도 확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두가 AI agent 도입의 초입에 서 있고, 아직 누구도 정답을 모른다는 감각이 더 컸다. 그래서인지 종종 뻔한 말들이 다시 나왔다. “AI native가 되어라”, “빠르게 반복해라”, “유저 가까이 가라”, “작은 팀으로 크게 움직여라”. 식상해서가 아니라, 답이 없을 때 결국 모두가 같은 기본기로 돌아오기 때문에 나온 말처럼 들렸다.
행사 자체도 AI와 펀드레이징이라는 두 힘의 한가운데를 다뤘다. VC 패널에서도 이미 알려진 왕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알려지기 전의 것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그 말도 답이라기보다 질문에 가깝다고 느꼈다. 이 글은 그 사이에서 건진 단서들과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을 같이 남겨두려는 참관기다.
1. AI native라는 정체성 — 만드는 방식 자체를 뜯어고치기
Replit의 창업자 Amjad Masad 세션은 이번 행사에서 가장 서사가 강한 이야기였다. Replit은 2016년 브라우저에서 바로 코딩할 수 있는 환경으로 시작했고, 오랫동안 “10억 명의 소프트웨어 제작자”라는 북극성을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AI 이전에는 너무 이른 말처럼 보였고, 실제로 Replit은 8년 동안 학교 판매와 코드 실행 API 같은 방식으로 버텼다. Amjad는 어떤 VC가 “세상에는 좋은 일이지만 돈은 못 벌 것 같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꺼냈다.
전환점은 agent였다. 그는 2023년 TED에서 AI agent가 코드를 쓰는 것을 넘어 디버깅, 데이터베이스 준비, 배포까지 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했다. 그리고 2024년에는 산만한 사업들을 닫고, 일부 인력 감축까지 감수하면서 agent에 올인했다. 그 결과 Replit Agent는 2024년 9월 출시됐고, ARR은 250만 달러에서 2억 5천만 달러로 1년 만에 100배 성장했다고 말했다.
Airbyte의 Michel Tricot이 말한 AI native의 정의는 조금 더 차가웠다. 그는 AI native가 된다는 것은 회사와 제품을 떠받치는 scaffolding을 계속 다시 보는 일이라고 했다. 모델이 못 하던 일을 우회하려고 만들어둔 코드, 프로세스, 인프라가 어느 순간에는 더 이상 필요 없는 부채가 된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걷어내고 다시 만드는 비용이 컸지만, 이제는 그 비용이 거의 0에 가까워졌다는 말이 핵심이었다.
Postman의 Abhinav Asthana도 비슷한 방향을 말했다. 10년 된 제품이라도 AI native 관점에서는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AI native는 “우리 제품에 AI 기능을 붙였다”가 아니다. 도구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회사를 설계하는 문법을 바꾸는 일에 가깝다.
다만 이 말에는 공백도 있었다. 모두가 AI native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회사 사례밖에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Amjad가 “AI를 만드는 일에는 거의 ego가 없어야 한다”고 한 말이 가장 정직하게 들렸다. 지금 만드는 것이 36개월 뒤에는 고객에게 의미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AI native의 가장 어려운 부분일지 모른다.
2. Agent의 시대 — 사람보다 agent가 첫 사용자
Atlassian의 Tamar Yehoshua와 Postman의 Abhinav Asthana가 나눈 패널에서는 agent를 1순위 사용자로 놓고 소프트웨어 스택을 설계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인간이 보기 좋은 화면만으로는 부족하고, agent가 이해하고 실행하기 쉬운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름 규칙 같은 작은 디테일까지 agent friendly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의외로 현실적이었다.
Atlassian의 Teamwork Graph 사례는 이 관점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Atlassian은 티켓, 문서, 사람 사이의 관계성 같은 협업 데이터를 agent의 컨텍스트 기반으로 활용한다. 흩어진 Slack, 문서, 통화 기록을 묶어 회사의 신경망처럼 만드는 이야기였다. 결국 agent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agent가 일할 수 있도록 회사 안의 맥락을 재조립하는 일에 가깝다.
이 패널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framing은 agent가 일을 못 하면 그건 agent의 잘못이 아니라 컨텍스트를 못 준 사람의 잘못이라는 말이었다. 보통 AI 도입 실패는 모델 성능의 문제로 환원되기 쉽다. 그런데 이 말은 책임의 방향을 바꾼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직접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컨텍스트를 설계하고 결과를 판단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Replit의 사례도 같은 방향으로 이어졌다. Amjad는 코딩 agent가 결국 general agent라고 했다. LLM에 코딩 환경을 주면 마케팅, 채용, 세일즈 같은 업무를 자동화하는 범용 업무 도구가 된다. 실제로 채용 담당자가 후보자별 맞춤 사이트를 6분 만에 만들고, 임원급 채용 응답률을 두 배로 높인 사례도 소개됐다.
내가 흥미로웠던 건 이 변화가 개발자보다 비개발자에게 더 크게 올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개발자는 어쨌든 새 도구를 받아들이고 적응한다. 하지만 마케터, 리쿠르터, 세일즈처럼 기존에는 직접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어려웠던 직군이 agent를 통해 작은 도구를 계속 만들어 쓰기 시작하면, 회사의 실행 단위가 달라진다. 사람은 컨텍스트 설계자이자 판단자가 되고, 실행은 점점 agent에게 위임된다.
3. 인프라/툴 레이어 — 다음 창업 기회가 여기에 있다
둘째 날에는 application layer 아래쪽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렸다. Lambda의 Robert Brooks는 inference economy를 이야기하면서 memory, energy 같은 bottleneck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Inception의 Stefano Ermon은 Mercury LLM과 diffusion 기반 언어 모델을 소개했다. 세부 기술 방향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분명했다. agent가 많아질수록 그 아래의 추론, 메모리, 에너지, 배포 레이어가 같이 흔들린다.
Airbyte의 Michel Tricot이 말한 “intelligence exfiltration”도 이번 행사에서 가장 신선한 표현 중 하나였다. 예전에는 기업이 데이터를 외부로 보내는 일을 걱정했다. 그런데 AI 시대에는 데이터뿐 아니라, 그 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에 대한 기업의 지능 자체가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특히 금융과 의료 같은 규제 산업에서는 이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의 문제라서, 온프레미스, VPC, 오픈소스 모델, 내부 agent 구축 같은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었다.
Linear의 창업자 Karri Saarinen은 agent를 위한 toolchain을 다른 각도에서 말했다. 핵심은 planning이었다. agent가 기능을 만들기 전에 정말 그 기능이 필요한지 비판적으로 검토하게 만들고, 단순히 output을 많이 내는 것이 아니라 제품의 방향성과 판단을 반영하게 하는 도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Linear의 “Output isn’t design”이라는 글도 언급됐다. 디자인은 결과물을 그리는 행위가 아니라, 무엇을 이해했는지에서 시작한다는 말로 들렸다.
나는 이 챕터가 이번 행사에서 가장 강한 takeaway 중 하나였다. 지금 모두가 application layer에 몰려 있지만, agent가 실제 회사 안에서 일하려면 그 밑의 레이어가 훨씬 촘촘해야 한다. MCP, CLI, context management, 권한 관리, 보안, 모니터링, agent용 planning 도구 같은 것들이 아직 비어 있다. 실행력이 폭발하면 검증과 제어의 가치도 같이 올라간다.
4. 마케팅과 적(enemy)에 대한 재정의
Figma의 Nairi Hourdajian과 Vanta의 Scott Holden이 나온 마케팅 패널은 의외로 오래 남았다. 주제는 category-defining AI company였지만, 핵심은 “너의 적은 누구인가”에 가까웠다. 패널에서는 Uber의 첫 번째 적이 Lyft가 아니라 택시였다는 예가 나왔다. 경쟁사가 아니라, 택시를 잡기 힘든 구식 경험 자체가 싸움의 대상이었다는 말이다.
Figma의 사례도 비슷했다. Figma의 why는 단순히 디자인 툴을 파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이라는 craft를 옹호하는 데 있었다고 했다. 디자인이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중요한 층이라는 점을 계속 설득하고, 디자이너 커뮤니티의 craft를 끌어올리는 일이 브랜드의 중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마케팅은 “우리가 무엇을 만든다”보다 “우리가 무엇을 옹호하고 무엇에 반대한다”에서 시작한다.
공격적 마케팅의 예로는 Brex가 Concur를 거의 욕설처럼 사용한 캠페인이 나왔다. 훨씬 큰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mindshare를 얻는 안전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반대로 Anthropic이 OpenAI를 겨냥한 Super Bowl 광고처럼, 비슷한 체급의 회사끼리 맞붙는 일은 더 위험하지만 그 싸움 자체가 시장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첫 마케팅 채용에 대한 조언도 꽤 실용적이었다. 퍼널 상단은 좋은데 전환이 새고 있다면 제품 마케팅이 필요하고, 데모만 하면 잘 닫히는데 리드가 부족하다면 growth나 demand gen이 필요하다. 커뮤니티가 중요하다면 brand와 storytelling이 먼저일 수 있다. 다만 지금은 AI 덕분에 한 사람이 예전보다 넓은 범위를 실행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내가 가장 크게 가져간 건 “적은 같은 카테고리의 경쟁사가 아니라 status quo”라는 점이었다. AI 시대에는 카테고리 자체가 아직 덜 굳어져 있다. 그래서 같은 카테고리 안에서 누가 더 기능이 많은지를 다투기보다, 사람들이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낡은 워크플로우와 싸우는 쪽이 더 큰 시장일 수 있다. 우리가 만드는 제품이 무엇을 옹호하고 무엇과 맞서는지 명확히 하는 일은 product-market fit 이전의 narrative-market fit에 가깝다.
5. 인재상과 일의 총량 — 오케스트레이션이라는 새 기술
이번 행사에서 반복적으로 느낀 것은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총량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Replit이 작은 팀으로 2억 5천만 달러 ARR까지 갔다는 이야기는 상징적이었다. Amjad는 raw IQ보다 entrepreneurial quality가 중요하다고 했다. 똑똑한 사람을 뽑는 것보다, 배경과 상관없이 resourceful하고 hungry하고, 어떻게든 일을 끝내는 사람을 봐야 한다는 말이었다.
Airbyte 쪽에서는 curiosity가 채용 기준의 1순위로 올라왔다고 했다. 예전에는 세 번째나 네 번째였지만, 지금은 근본적인 소프트웨어 역량이 있고 AI를 잘 활용할 줄 아는 호기심 많은 사람이, 호기심 없는 최고 수준의 코더보다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 말은 엔지니어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제품, 마케팅, 세일즈 모두에서 “이 일을 더 잘할 다른 방법은 없을까”를 계속 찾는 사람이 더 중요해진다.
조직 형태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Airbyte는 AI pivot 과정에서 remote에서 San Francisco 중심의 in-person으로 전환했고, 그 이유를 latency와 serendipity로 설명했다. 궁금증은 항상 의도적으로 생기지 않고, 옆자리에서 들리는 말에서 튀어나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Linear의 Karri가 말한 planning, taste, judgment도 같은 인재상으로 이어진다. agent가 output을 만들 수 있다면, 사람의 역할은 더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만들지, 무엇을 만들지 않을지, 어떤 결과물을 받아들일지를 판단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Output isn’t design”이라는 말은 그래서 디자인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재상 이야기였다. agent는 그릴 수 있지만, 사람은 이해하고 판단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오케스트레이션이라는 단어가 새 기술처럼 들렸다. 단순히 agent를 많이 쓰는 능력이 아니다. 동시에 여러 agent, 세션, 태스크를 굴리면서도 taste와 judgment를 잃지 않는 능력이다. 요즘 반쯤 농담처럼 “context switching에 강한 ADHD-leaning 인재가 agent 시대에 맞다”는 이야기가 도는 것도 이 맥락에서는 이해가 된다.
그리고 오케스트레이션의 다음 bottleneck은 human feedback일 가능성이 크다. agent가 빠르게 실행할수록, 사람이 어디서 개입해야 하는지와 어떻게 피드백을 줄 것인지가 중요해진다. 잘못 설계하면 사람의 판단이 병목이 되고, 너무 느슨하게 설계하면 위험한 실행이 그대로 지나간다. 그래서 monitoring과 feedback을 빠르고, 쉽게, 정확하게 만드는 인터페이스 자체가 다음 제품 카테고리가 될 수 있다고 느꼈다.
6. 나가며 — 초입기에서 빠르게 반복한다는 것
이틀을 지나고 나니 두 가지가 동시에 사실처럼 보였다. 하나는 지금이 창업하기 좋은 시기라는 것. building cost는 계속 내려가고 있고, 작은 팀이 예전보다 훨씬 큰 시장을 노릴 수 있다. AI 시대의 성장 속도는 기존 소프트웨어 문법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모두가 정답을 모른다는 것. 그래서 Amjad가 말한 “long-term patient, short-term fast”가 가장 정직한 조언처럼 들렸다. 5년, 10년 뒤에도 변하지 않을 인간의 니즈를 생각하되, 가까운 기간에는 훨씬 빠르게 만들고 사용자에게 보내야 한다. 오래 기다리는 능력과 짧게 반복하는 속도가 동시에 필요해진다.
이번 행사에서 가장 자주 들은 단어는 결국 iterate였다. 빨리 만들어서 유저에게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고, 다시 만들고, 또 내보내는 일. 답이 없으니 답을 시장에서 찾아야 한다. 다만 그 iteration의 도구가 점점 agent로 이동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보는 창업 영역도 application 하나가 아니라 그 밑의 agent 인프라다. MCP, CLI, context, memory, permission, human-in-the-loop, monitoring. agent가 실제 회사의 일 속으로 들어갈수록 이런 것들은 더 이상 보조 도구가 아니라 필수 레이어가 된다.
확신 없는 시기에 살아남는 법은 더 빨리 틀리는 것이다. 이번 Startup Grind는 모두가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꽤 솔직하게 보여준 행사에 가까웠다. 지금은 그 정도의 솔직함이 제일 쓸모 있는 태도일지도 모르겠다.